모든 생명들이 모습을 감추는 계절. 혹은 그 수명이 다하여서, 혹은 힘을 보충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덮은 하얀 눈 아래로 숨어들었다. 고요함만이 가득 찬 계절 속에서 홀로 다른 빛을 내며 고개를 드는 존재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시기를 잘못 탔다고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이 추운 계절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채 한 번 피지 못하고 얼어붙을 가여운 생명을 측은히 여겼다.

 

 

 

 

 

[쿱지] 동백꽃 01

Written by. 11월의 눈꽃

 

 

 

 

 

 동방에 자리하는 나라는 그 지역마다 특색이 확실하여 그 모습을 따라 국호를 정하였다. 그 중심에는 꽃들이 항상 만개하여 지는 날이 없어 그 꽃들의 아름다움을 따라 화(花)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존재했다. 하지만 화국이라 이름하였던 건 비단 꽃이 많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온 백성들이 평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늘 백성 중심의 국정을 다스리는 황제님의 마음씨가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던 것 또한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수천 년에 걸쳐져 내려온 황실이었지만 그 이념은 변함이 없었고, 화국에는 언제나 봄기운과 꽃향기가 가득 머물렀다.

 

 현 국정을 맡고 계신 황제 폐하께서도 그 성정이 고우셨는데 그 심성을 꼭 빼닮은, 아니 그보다 더 온화한 아들이 있었다. 왕자 시절부터 총명하기는 두 말 할 것 없었고, 황제께서 국정으로 고민할 때면 종종 현명한 안을 올려 그 고민을 풀어드리곤 했다. 그렇기에 화국의 백성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승철 왕자님은 분명 성군이 되실 거라고.

 

 승철은 열 일곱이 되던 해에 그 역량을 인정받아 모두에게 촉망받는 태자로 책봉되었다승철 역시 화국을 사랑했기에 성년이 되기 전에도, 성년이 된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태자로서의 역할에 노력을 다 했고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태자 전하의 미래를 무척이나 기대했다줄곧 따뜻했던 곳에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어쩐지 궐 안이 어수선 하구나. 찬아, 뭐 들은 거라도 있어?”

“글쎄요. 이웃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이려나요.”

 

 

 

 오늘따라 유독 소란스러운 공기가 태자전까지 퍼져들어갔다. 승철은 호위무사인 찬과 함께 검술 대련을 하다가 결국 궁금함에 못 이겨 검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궐 안에 이런저런 소식을 꿰고 다니던 찬에게 물어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여 궁금함은 커져만 갔다. 이웃나라에서 사신이 왔다면 분명 어떠한 소식을 들고 왔을 텐데 평소와 다르게 저를 부르지 않는 아바마마의 의중도 알 수가 없었다.

 

 

 

“네가 한 번 몰래 다녀와 볼래?”

“전하, 저희는 대련을 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옵니다.”

“너 가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꼭 이럴 때만 말을 높인다?”

“들켰습니까? 어차피 곧 알게 될 터인데….”

“태자 전하, 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환복 하시고 편전으로 드시옵소서.”

 

 

 

 승철과 찬이 땀을 닦으며 농을 주고 받을 때 언제 온 것인지 상선이 폐하의 명을 전해왔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승철의 얼굴에서도 단번에 웃음기가 지워졌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심각한 기운에 승철은 빠르게 채비를 마친 후 아바마마가 계실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에 들자 대신들은 전부 물러났는지 황제만이 홀로 어좌에 앉아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짚은 모습이 쉬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듯하여 승철이 조심스럽게 아바마마의 앞으로 나아갔다.

 

 

 

“아바마마, 부르셨사옵니까.”

“…아. 태자가 왔구나. 내가 너를 불렀지. 그래… 널 불렀어.”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지금이라도 어의를 들라 할까요?”

“아니다. 난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내가 널 부른 것은 긴히 할 말이 있어 들라 하였다.”

 

 

 

 승철은 아바마마께서 이렇게까지 어두운 안색을 비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은 더 깊어만 갔다. 황제는 한 나라의 근엄한 통치자였지만 또 가족에겐 온화한 아버지였다. 그는 늘 승철에게 아버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벗으로도 많은 걸 함께했다. 그래서 승철은 저에게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아바마마의 모습에서 의아함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꼈다.

 

 

 

“승철아.”

“예, 아바마마.”

“내가 늘 네게 했던 말 기억하느냐? 선택할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었는지.”

“타인에게 떠밀리지 말고 내가 원하는 바를 선택하되 선(善)을 잊지 말라 하셨습니다.”

 

 

 

 승철의 대답은 황제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황제의 고개를 숙여지게 만들었다.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부디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라건만….

 

 황제는 숙여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승철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승철이 어좌에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를 바라보는 아바마마의 눈빛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너는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설국의 황제가 너와 혼인하고자 한다면….”

“…예?”

 

 

 

 설국은 인근의 국가들을 다 합쳐도 이기지 못할 막대한 권력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설국에서 사신까지 보내오며 화국의 왕자를 설국의 황후로 삼고 싶다고 전해온 뜻을 거절하기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왜 갑자기 설국의 황제가 승철과 혼인하고 싶다는 건지, 그 의중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보통 나라 간의 혼인은 혼인을 앞세운 계약에 가까웠으니 더 보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국이라 해도 자식을 볼모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황제의 마음으로 화국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 뜻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으로 승철을 생각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뜻을 거부하고만 싶다. 그래서 승철에게 마지막 선택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승철의 선택에 따라 아버지의 역할로도, 황제의 권력으로도 승철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제 아들이 무엇을 선택할지. 그럼에도 구태여 승철에게 선택을 물은 것은 제발 승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의 발목에 매인 족쇄를 보고 마음 편히 그 등을 밀어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것은 태자에게 화국의 황제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승철이 네 아비로서 하는 말이다….”

…….”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터이니, 네가 마음 가는 대로 선택 하거라.”

 

 

 

 승철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닥쳐온 이 무게감이 견딜 수 없이 저를 짓누르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뜨면 바람 같이 사라져 버리는 실 없는 꿈이길 바라는 허무한 생각도 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하라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이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이유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그렇게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인 걸 승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결국 승철의 대답은,

 

 

 

"…저에게 생각할 말미를 주세요."

"그래. 설국의 사절단들도 보름간 화국에서 머문다고 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렴."

"예. 아바마마."

"네가 무엇을 선택한 들 모두가 네 뜻을 따를 것이야. 그러니 부디 너를 잘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승철은 아바마마께 인사를 올리고 편전을 빠온 후, 머리 속이 온통 먹으로 가득찬 듯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들지 않아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발을 옮겼다. 밖에서 기다리고 섰던 찬이 전각에서 나오는 승철을 부르려다가도 그 표정을 보고 소리를 안으로 삼켜야 했다. 낯빛이 좋지 않아 그저 승철의 뒤를 지키며 걷는데 앞서가던 승철이 맥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전하!"

 

 

 

 놀란 찬이 승철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급하게 살펴보는데 승철이 바닥으로 숙인 고개를 들려하지 않았다. 승철을 부축하려 해도 고개만 숙이고 있는 모습이 걱정이 된 찬이 결국 승철을 업으려던 순간, 천천히 승철의 고개가 들렸다.

 

 

 

"난 괜찮다. 넘어지면서 다리가 조금 아팠을 뿐이다."

"전하…."

"조금, 아주 조금… 아프구나."

 

 

 

 애써 웃고 있는 승철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승철을 모셔온 찬이의 눈에는 왜 그 웃음이 다르게 비치는 것일까. 찬은 승철에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정녕 아픈 것이 다리입니까, 전하.

 

 다가온 겨울의 기척에 꽃들은 속수무책으로 그 잎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